엄청나게 지쳐있던 8월, 어딘가에 처박혀 하루 종일 책만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계획하고 예약하는 것과 거리가 먼 내가 찾아보기 시작했을 땐 이미 호젓해 보이는 숙소들은 1년 치 예약이 끝나 있었다.
갑자기 훌쩍 떠나고 싶은 사람은 어디로 가라고! 1년 뒤 내가 그곳으로 떠나고 싶을지 어떻게 알지? 야속했지만 체념했다. 예나 지금이나 게으른 사람은 먹이를 못 먹는거지 뭐.
그때 생각난 곳이 대전의 교토라고 하는 에어비앤비 숙소였다. '교토 스탠다드' 이곳은 평일 예약이 가능해 9월 초로 예약을 잡고, 휴가를 한번 더 쓰기로 했다. 당장 그만둘지도 모르는 회사 연가 2일 더 쓰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물론 눈치는 봤다.)


정말 호젓하고 조용한 동네에 일부러 찾지 않으면 모를 구석에 숨어있다. 내가 찾던 곳이다.




들어가자마자 엄청나게 고요했고 시공간을 초월한 것처럼 외부 소음이 다 차단돼있었다.(샷시를 좋은 걸로 한듯)
라디오만 틀어져있었는데 출근길에 듣는 클래식 FM 채널이었다. 뜻하지 않은 반가움과 이런 곳에서 들으니 두배는 진해진 감성이 차올랐다.




소품 하나하나(화분을 담는 바구니까지) 다른 시간대 다른 장소에서 구매한 것 같았지만 통일성이 있었다. 소품이 많은데도 정돈된 느낌이 든다.
이게 인테리어의 힘이겠지.
이곳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매번 반복되는 이상적인 집의 모습 같았다. 군더더기 없지만 주인의 안목을 보여주고 물건들은 멋을 과시하기보단 실용적이었다.
소파와 의자들은 모두 편했다. (요즘 카페에 흔히 있는 예쁘지만 척추 나가는 의자들이 굉장히 불만스럽다. )
이중창이 견고하게 소음을 막아주고, 간접등만으로 이뤄진 조명은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특히 내가 맘에 들었던 건 침대와 침구이다.

한 달 정도 고양이와 회사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정말 오랜만에 오래 푹잤다. 침대도 편하고 이불은 몸에 폭 감겼다. 나만 쓴 이불도 아닐 텐데 이렇게 쾌적할 수가 있다니. 오래간만에 흰자위가 말끔히 하얘졌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정말 책 읽기 좋은 곳이다. 다다미 냄새가 풍기고 햇빛은 나른하게 쏟아지고 해가 지고 나면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클래식 FM 라디오는 선 넘지 않는 음량으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하루키 여행 에세이 한 권(먼 북소리)과 소설(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한 권을 가져가 읽었다.



조용하고 사람 없는 밤 산책. 내가 꿈꾸는 삶의 한 부분이다.
아침 8시쯤 가장 풍만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여유롭게 받는 것, 해가 질 때쯤 나가서 좋아하는 사람과 걷는 것.
이 두 가지만 이루고 살아도 행복한 삶이다. 이 좋은 순간에도 '왜 나는 못하는 걸까?'를 생각하느라 많이 괴로웠다. 이런 좋은 동네에서 그저 조용하게 살만큼의 부가 내게 있었으면 좋겠다.

양과 메뉴 다 적당하고 맛있었던 저녁. 재밌는 티비 프로가 안 해도 좋았다.

1박 2일 동안 하루키 소설을 거의 다 읽었다. 여행과 어울리는 고요한 소설이었다. 여행에서 책을 읽으면, 책을 다시 읽을 때 그 계절과 장면이 떠오르는 감동을 몇 번이고 재현할 수 있다.






가을이 시작되는 날 볕에 포근히 감싸져 있는 이런 곳에 하루라도 묵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런 하루가 나날이 되고 내 일상이 된다면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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