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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는생각

51:49의 사람

by 일인분 2022. 1. 31.

공감성이 높다거나 감수성이 깊은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그것들을 내세우는 사람이 맞겠다.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뱃지처럼 내건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다. 그들은 대개 자신의 선의가 1번이며 남들의 피해는 별 것 아닌걸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범주엔 자신의 집 옆이 아닌 곳에 밥을 주는 캣맘이나 인류애를 앞세워 금지된 곳에 선교를 갔다가 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종교인들, 엄마의 집안일은 도와주지 않는 페미들 등이 있다.

어쩌다 들린 작은 서점에서 보게 된 시인의 산문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이 여기까지 흘렀다.
그 섬세한 표현에 젖어들다가도, 그게 과해 작위적으로 느껴지거나 마치 본인의 공감능력이 인류의 대의를 짊어진 것 처럼 굴때면 몰입이 깨져버렸다.

난 대부분 염세적으로 살다가 가끔 감수성이 충만해진다. 그럴땐 마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예술인이 지인으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런 책을 읽고나면 이내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부류다'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런 나도 공상에 늘 빠져산다. 고요함과 평화를 위해선 얼마든지 환상과 상상안에서 갇혀살 수 있다. 그래서 아직도 내가 현실적인지 감상적인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51:49의 사람이니까.

이게 MBTI를 믿지 않는 이유이다. 그 테스트에서도 난 51:49의 차이로 한 쪽으로 분류되고, 그쪽엔 100부터 51의 사람이 공존하게 된다. 알파벳 4개로 묶인 집단 구성원의 편차는 그만큼 더 커진다.
게다가 애초에 이 테스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본인의 성격이기 때문에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결과지를 보고 소름돋게 자신이 맞다며 호들갑떠는게 오그라든다.
'내가 바라는 성격이니 맞고 싶다.'가 정확한 표현 아닐까.

절친 A는 MBTI를 굉장히 신봉한다. 모든 사람을 그 틀로 분류하고, 자신과 안맞는 알파벳을 정해두곤 절대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못을 박았다.(나중에 알게됐는데 그 알파벳은 내 유형에 속했다.)
그녀가 MBTI를 믿는 방식은 컨디션에 따라 달랐다. 삶이 행복한 시점엔 본인의 유형을 사랑했으며, 그 특성 안에서 사랑할만한 점만 찾아 공감했다. 최근엔 삶이 퍽퍽한지 본인의 유형은 아무 쓸데도 없으며 다른 유형에 속하고 싶다고 했다.(아까말한 내 유형이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관점 안에서도 오락가락하는 유형에 속한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 떼거지로, 심지어 타입으로 명명되어 존재하는게 싫다. 무리로 존재하고 싶지 않다.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 는 것 따위로는 위로되지 않고, 어렵게 찾은 누군가가 내 생각의 한 조각을 가지고 있을 때 감동을 느낀다.
그래서 인터넷에 널린 MBTI별 특성을 보고 코웃음치면서도, 무심코 읽게된 책에서 내가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나를 닮은 글귀 한줄을 만나는 순간을 기다린다.

본인을 특별하다고 여기며 사는 게 아니꼬울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세상을 뭘로 살아가나 싶다.
비슷한 사람들과 비슷한 인생을 그저 유대하며 살아가기엔 삶이 너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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