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성이 높다거나 감수성이 깊은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그것들을 내세우는 사람이 맞겠다.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뱃지처럼 내건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다. 그들은 대개 자신의 선의가 1번이며 남들의 피해는 별 것 아닌걸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범주엔 자신의 집 옆이 아닌 곳에 밥을 주는 캣맘이나 인류애를 앞세워 금지된 곳에 선교를 갔다가 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종교인들, 엄마의 집안일은 도와주지 않는 페미들 등이 있다.
어쩌다 들린 작은 서점에서 보게 된 시인의 산문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이 여기까지 흘렀다.
그 섬세한 표현에 젖어들다가도, 그게 과해 작위적으로 느껴지거나 마치 본인의 공감능력이 인류의 대의를 짊어진 것 처럼 굴때면 몰입이 깨져버렸다.
난 대부분 염세적으로 살다가 가끔 감수성이 충만해진다. 그럴땐 마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예술인이 지인으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런 책을 읽고나면 이내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부류다'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런 나도 공상에 늘 빠져산다. 고요함과 평화를 위해선 얼마든지 환상과 상상안에서 갇혀살 수 있다. 그래서 아직도 내가 현실적인지 감상적인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51:49의 사람이니까.
이게 MBTI를 믿지 않는 이유이다. 그 테스트에서도 난 51:49의 차이로 한 쪽으로 분류되고, 그쪽엔 100부터 51의 사람이 공존하게 된다. 알파벳 4개로 묶인 집단 구성원의 편차는 그만큼 더 커진다.
게다가 애초에 이 테스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본인의 성격이기 때문에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결과지를 보고 소름돋게 자신이 맞다며 호들갑떠는게 오그라든다.
'내가 바라는 성격이니 맞고 싶다.'가 정확한 표현 아닐까.
절친 A는 MBTI를 굉장히 신봉한다. 모든 사람을 그 틀로 분류하고, 자신과 안맞는 알파벳을 정해두곤 절대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못을 박았다.(나중에 알게됐는데 그 알파벳은 내 유형에 속했다.)
그녀가 MBTI를 믿는 방식은 컨디션에 따라 달랐다. 삶이 행복한 시점엔 본인의 유형을 사랑했으며, 그 특성 안에서 사랑할만한 점만 찾아 공감했다. 최근엔 삶이 퍽퍽한지 본인의 유형은 아무 쓸데도 없으며 다른 유형에 속하고 싶다고 했다.(아까말한 내 유형이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관점 안에서도 오락가락하는 유형에 속한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 떼거지로, 심지어 타입으로 명명되어 존재하는게 싫다. 무리로 존재하고 싶지 않다.
'나와 같은 사람이 많구나' 는 것 따위로는 위로되지 않고, 어렵게 찾은 누군가가 내 생각의 한 조각을 가지고 있을 때 감동을 느낀다.
그래서 인터넷에 널린 MBTI별 특성을 보고 코웃음치면서도, 무심코 읽게된 책에서 내가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나를 닮은 글귀 한줄을 만나는 순간을 기다린다.
본인을 특별하다고 여기며 사는 게 아니꼬울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세상을 뭘로 살아가나 싶다.
비슷한 사람들과 비슷한 인생을 그저 유대하며 살아가기엔 삶이 너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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