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 지하철을 기다릴 때의 일이었다.
한적한 시간대여서 기다리는 사람도 몇 없었다. 그때 '부왁!'하는 소리가 났다.
내 귀와 지금껏 축적된 데이터들은 이건 틀림없는 방구소리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지성인인 나는 설마 아닐거라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때 소리가 들렸던 구석에서 조그마한 할머니가 걸어나왔다.
'설마..?'
그랬다. 소리의 진원지였다.
그 할머니는 지하철이 올 때까지 '저 작디작은 몸 안에 저만한 가스를 응축시킬 만한 장기가 과연 어디있을까?'싶은 정도의 방구를 껴댔다.
겹겹이 쌓인 큰 북을 주먹으로 뚫는 소리같았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남자친구와 나는 빈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다행히 옆칸으로 탔고 그칸엔 자리가 남아있었다.
'다행히 내 옆엔 안오겠다.'
순간 할머니가 내 쪽을 바라봤다. 섬찟했지만 동시에 젊은 여자가 내 옆 빈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내 삶의 은인. 고마워요.'
아니, 근데 내 마음의 소리가 할머니에게 들리는 걸까?
할머니는 엄청난 속도와 우악스러움으로 내 칸으로 돌진하더니 젊은 여자를 밀어버리고 내 옆에 앉았다.
'아니 도대체 왜? 바로 앞에 자리가 있었잖아요!!'
정말 울고싶었다. 이상한 사람을 보면 정말이지 난 불쾌해진다. 그 유난함이 할머니를 끌어당긴걸까? 아니고서야 이 일은 설명이 안된다.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간헐적으로 방구를 뀌어댔다. 불어댔다는게 맞는 표현일까?
소리가 얼마나 큰지 이쯤 타이밍에 뀔 걸 예상하고 있는데도 난 놀라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말 그대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몇 번 반복되자 이 상황이 너무 웃기기 시작했다. 트루먼쇼던지 몰카던지 둘 중 하나 같았다.
'앞 자리에 앉아있는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웃음을 참는거지? 연기가 아니라면 말이 안되잖아!'
생각이 이쯤되자 더이상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끅끅댔고, 사람들은 방구 뀌는 할머니와 끅끅대는 나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이게 안웃기다고? 내가 이상하다고?'
할머니는 2단계 몰카에 돌입했다는 듯 이상한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물론 방구는 진행중)
"구구구구 도도도도"
난 모자를 코까지 덮은 채 거의 울고 있었다.
할머니는 곧 세자리를 차지하더니 사람들이 다가오면 못 앉게 쫓아버렸다.
피날레를 위한 준비단계였지 싶다.
할머니는 갑자기 엉덩이를 들고 양 손은 주먹을 쥐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설마..?'
그렇다. 그녀는 발사를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할머니의 몸은 발사되듯 입구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하차했다.
'방구가 아니라 추진력이었어..?'
참을 수 없을까봐 곁눈질로 봤는데도 감당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쓰고 있는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이게 어떤 심리적 착시인지 확증편향인가 뭔가인가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난 이제 확신한다.
내가 그 할머니를 끌어당겼다. 세상엔 정말 내가 끌어당기는게 존재한다.
회사 테이블에 깔려있던 신문에서 무심코 거꾸로 읽은 인물이 그날 저녁 멈춘 채널에서 나오기도 하고, 무작위로 보게 된 책, 영화, 인스타 글들이 모두 한 주제를 관통할 때도 있다.
분명한 건 싫어하는 게 더 잘 끌어당겨진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피하고 싶으면 흘려보내야한다.
아니면 방구 할머니처럼 유쾌하게 겪어 보는 방법도 있다. 늘 이렇게 유쾌할 것이라 장담은 못하지만.
아무튼 2023년중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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