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했다. 4년 동안 살던 익숙한 동네를 떠났다. 물론 멀지 않은 거리지만 생경한 동네로 오게 됐다.
집이 넓어졌고, 출퇴근 수단이 버스에서 지하철로 바뀌었고, 식구가 한 명 늘었다.
남자 친구와 같이 살게 되어 사람 둘에 고양이 하나가 되었다.
이 집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채광이다.



구축인 덕에 요즘 신축에선 볼 수 없는 속 시원한 큰 창에 바로 앞에 건물이 붙어있지도 않아 빛이 그대로 들어온다.
집을 구하러 다니며 확실히 느꼈다. 난 인프라, 환경보다 햇빛 가득한 하늘을 방해 없이 볼 수 있는 집이 우선이다.
물론 출근 때문에 이 채광을 볼 수 있는 것도 주 2회뿐이지만 말이다.

다행히 남자 친구와는 휴일 패턴이 어긋난다. 난 주말에 쉬고, 남자 친구는 주말에만 일한다.
휴일이 어긋나 이 생활이 지속될 수 있다.
난 평생 누군가와 같이 못 살 줄 알았다. 예민하기도 하고, 혼자 살며 잡힌 수많은 나만의 기준들이 어겨지는 걸 못 견딜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동거의 장점을 말해보자면, 특히 평일에 좋다.
이사할 때쯤 회사일이 정말 바빴는데, 야근하고 온몸을 탈수기에 돌린 것처럼 지쳐 돌아오면 누군가 고양이와 함께 뛰쳐나오는 게 생각보다 기쁜 일이었다. 이래서 가장들이 다음날 이 악물고 일어나 출근하나 보다.
혼자 살 땐 저녁을 잘 안 챙겨 먹은 것 같은데, 항상 저녁을 차려주니 벌써 버릇이 들어버렸다.
같이 태블릿을 놓고 미드를 보며 와구와구 식사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바쁜 시기가 끝나고 나서는 얼른 퇴근해 집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같이 밥을 먹고, 빨래를 개고, 귀도리를 하고 근처 도서관까지 산책 갔다 오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
왜 공기도 사람도 안 좋은 회사에서 10시간을 보내고 이런 소중한 시간은 4시간 남짓인지 서럽다.



둘 다 책을 좋아한다.
남자 친구 책이 압도적이었지만 책을 합쳐보니 책꽂이가 부족했다. 안 읽은 책이 대다수지만, 가진 책 말고 새로운 책에 눈이 돌아가는 게 인지상정.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온다.
휴일이 어긋나는 게 큰 다행인 점은, 아무 잔소리 없이 축 늘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각자 다른 방에 있어도 어쨌든 나 말고 다른 존재가 저기 있다는 걸 알아채게 되는데, 그럼 온전히 쉴 수가 없다.
아무 소음 없이 고양이와 늘어져있으면 시간이 블랙홀처럼 사라진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행복하다.



이 생활에서 주 2일만 일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집은 바뀌었지만 난 여전히 같은 상태에 같은 걸 바란다. 퇴사와 자유와 게으름을 원한다.
그 씁쓸함 빼고는 전반적으로 행복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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