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맨스가 필요해, 커피 프린스 1호점’을 60년대에 풀어냈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흔한 사랑이지만 인물들의 배경은 흔하지 않아 어딘가 동경하게 되는 로맨스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젊은 느티나무’는 소년소녀의 사랑이야기지만 배경은 큰 저택인 점, 그에게서 나는 비누향기, 간식으로 먹는 코카콜라와 크래커, 흰 쇼츠와 곤색 셔츠를 입고 치는 배드민턴 등 일상적인 소재지만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많다.
‘절벽’엔 죽음을 앞둔 사랑의 어두운 분위기에서도 진피즈, 하이볼, 레스토랑에서 먹는 굴 요리 등 어른의 감성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가 곳곳에 있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더 어린 시절 좋아했던 ‘커피프린스, 로맨스가 필요해’를 보면 일상적이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요소들이 꼭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 사먹는 갓 나온 빵, 연인과 함께 크게 듣는 LP판 음악(그러려면 큰 집이 있어야한다), 현실의 내겐 허용되지 않는 자유로운 밤 산책까지..
연애소설의 가장 중요한 룰은 현실에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없는 포인트들이다. ‘젊은 느티나무’에선 아마 60년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을 부유한 환경과 멋진 이복오빠가 있고, ‘절벽’에는 곧 죽을 운명 앞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순애보 첫사랑이 있다.
둘 중 ‘절벽’이 더 내 취향에 가까웠는데 비극과 사랑을 잘 버무려 놓았기 때문이다. 작품해설에서 와 닿은 표현처럼 죽음과 사랑 둘 다 피하려야 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경아는 젊은 나이에 찾아온 죽음을 덤덤히 받아드리려 하지만 운명처럼 죽음 직전에 찾아온 사랑은 필사적으로 피하려 한다. 결국 사랑은 피할 길 없이 스며들었고, 이번엔 죽음에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녀는 수녀가 있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길 바랬다. 그들은 ‘사람은 죽는 것’이라는 명제를 갖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죽음을 당연시하는 사람들 곁에선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태를 사랑하게 되며 경아에겐 더이상 죽음이 당연시 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죽음과 사랑 둘 다 절대적이기에 거부한다고 피할 수 없고, 공유한다고 그 무게가 나눠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며 끝이 난다.
'죽음'은 둘이서 나누어 가져보아도 조금치도 가벼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통곡을 하는 대신 현태는 그런 산수를 풀이하고 있었다.
통곡을 하는 대신 그는 심장으로 끝없는 절벽을 더듬고 있었다. / '절벽'
어떤 상황에도 찾아오는 사랑과 죽음, 운명 앞에서 이성적일 수 없는 사람들의 선택 그 관계를 탁월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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