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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서평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양귀자

by 일인분 2020. 11. 22.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이후로도 그 경험에 매여 사는 경우가 많다. 트라우마가 생겨 평생을 고통 받거나 오히려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식으로 그 영향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강민주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폭력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이 땅의 모든 여성을 구제할 구세주라고 생각해 그것에만 매여 살았기 때문이다. 삶의 동기가 분노로 정해졌기 때문에 뛰어난 지성과 이성을 가졌음에도 그녀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상처받은 여성들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아예 모든 남자들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사사로운 복수심에 거국적 이유를 붙이기 위해 최대한 비극적인 여성들의 상황을 수집한다. 무보수로 여성 심리 상담센터에서 일하는 이유는 자신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단서를 모으기 위함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의 사례와 주장만을 접하다 보면 당연히 세상을 편협하게 살 수밖에 없다. 중립을 유지하려고 해도 일단은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해줘야 하고, 그러다보면 부정적인 감정은 쉽게 옮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평생을 기다려 온 거사에서 백승하라는 반례를 만난다. 20년 넘는 세월을 눈과 귀를 닫고 남자에 대한 혐오감으로 살았던 그녀는 8개월의 짧은 시간동안 그의 부드러움에 변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 모든 남자들이 그녀가 수집해 온 가해자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처음 느껴 본 감정에 당황하지만 빠르게 변하고 깨닫는다.

 그녀가 죽지 않고 납치극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후 원래 삶으로 돌아갔어도 예전처럼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젖어있는 것들을 너무 많이 봐버렸기 때문이다. 민주는 본인이 남자라는 종족을 단죄하기 위해 내려온 신의 자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눈물 흘리는 모든 것들에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연극이 끝날 때쯤에야 알게된다.

 

남자들의 눈물은, 남자들의 절망은, 아니, 남자들의 젖은 날개조차 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모든 젖어있는 것들은, 그것이 여자의 얼굴이건 남자의 얼굴이건 관계없이 나를 슬프게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서서히 깨닫는다. 모든 젖어있는 것에 나는 태연할 수 없다. 젖은 얼굴의 비애 앞에서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한다.

 

 이 소설은 92년도에 쓰였지만 오히려 지금 세상과 가까운 모습이다. 요즘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상처와 분노를 품고 있다. 페미니즘과 과열된 남녀간 싸움은 이미 객관적 근거 없는 떼쓰기로 변질되었다.

내가 입은 상처가 더 크니 너희 편이 희생으로 보상해라하는식의 주장은 소모적인 감정싸움만 부추길 뿐이다. 강민주의 복수도 본인은 변화시켰지만 결국 같은 여자인 백승하의 아내에게 우울증을 남기며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냈다.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은 택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편하고 쉬운 길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건 적을 만들어 쌓인 분노를 털어내는 게 아니라 서로 어떤 상처가 있는지 들여다보며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결국 윈윈이라는 것이다. 강민주의 납치극이 그저 테러, 보복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그녀의 마음이 변화했다는 것이 작가의 이런 의도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다기보다는 상처로 인해 세상을 편협한 시야로 살아가던 여자가 자신이 생각 못했던 인간의 모습에 위로받는 과정을 그렸다고 소개하고 싶다.

 

슬픈 희극도 있는 법이고 우스운 비극도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나 삶이란 이름의 연극무대에는 어떠한 전제도 의미를 갖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어떠한 반어도 수용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삶만큼이나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경험을 생산하는 것은 다시없다.

 

 분노는 한 꺼풀만 벗겨내면 연약한 상처가 드러난다. 그래서 남녀 갈등이 심화될 때마다 안타깝다. 이 좁은 땅에서 되는 일 없고 상처투성이인 사람들끼리 왜 싸우려고 할까? 증오는 본인이 가장 힘든 감정인데 말이다. 상처를 입은 건 슬픈 일이지만 전체를 적으로 매도해 미워하는 건 서로의 상처를 더 찢어놓을 뿐이다. 혐오도 습관이 된다. 사랑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미워하는 마음은 접어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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