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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서평

호주머니 속의 축제(a moveable feast) - 어니스트 헤밍웨이

by 일인분 2020. 8. 23.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본다는 게 이 책까지 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예술가 대부분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한명씩 검색하며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봤더니 아는 사이처럼 아련하게 느껴진다.

 1920년대 파리는 분명 더럽고 축축했을텐데 이 책의 분위기에선 뽀송한 겨울 냄새가 난다. 장작불, 커피, 신 포도주, 오래된 책, 햇빛 냄새 같은 것들이다. 읽다보면 그의 단골 카페인 라일락숲 카페 구석에 앉아 그와 친구들을 관찰하는 듯 한 느낌이 든다. 그 시절 파리의 가난과 불편함까지 감수할 자신은 없지만 몇 줄 글로도 전해지는 그 넘치는 낭만은 겪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 낭만을 가능하게 했던 후원가들의 존재가 부러웠다. 생계 때문에 작품 활동에 전념하지 못하는 재능있는 신예들이 직장을 그만둘 수 있게 모금운동까지 벌이는 키다리 아저씨가 내 뒤에 있다면 내일 직장에 돌아갈 일은 없을텐데! 물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조여 왔겠지만, 부모도 아닌데 내 잠재력을 알아봐주고 일을 그만 둘 수 있게 날 밀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너무 매력적이다. 돈이 많지만 무료함을 느낀 부호들과 가난한 예술가들이 만나면 그런 낭만시대가 터지는가 보다.

 

헤밍웨이도 가난했지만 오히려 배고플 때 샤갈의 그림이 선명하게 보인다며 굶주림은 최고의 스승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알려진 것처럼 음식 묘사에 굉장히 탁월하다.

맥주는 아주 차가워서 마시기가 좋았다. 양념장을 치고 튀긴 감자는 단단했고 올리브 기름은 맛이 아주 기막혔다. 나는 후추를 갈아 감자에 뿌리고 빵을 올리브기름에 적셨다. 맥주를 한 모금 주욱 들이킨 다음에 나는 아주 천천히 술을 마시며 식사를 했다.

하루 정도 단식 후 휴가를 보내러 가는 기차 안에서 이 책을 읽었다가 배딱지가 곯을 뻔했다. 이게 바로 그가 말한 굶주림 탓에 예술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경험인건가? 결국 다 읽고 나서 굴과 백포도주의 조합이 너무 궁금해서 팔자에도 없던 와인을 한 병 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험프티 덤프티 형제의 굴 요리 이후로 굴이 이렇게 당기기는 처음이다. 먹방보다 맛깔나게 묘사한 글 한 줄이 더 그 음식을 갈망하게 하는 것 같다.

 

 헤밍웨이는 음식에 대한 순수한 열정뿐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정수를 집약해 참된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장편 소설을 쓰기가 힘이 들었다고도 밝혔다. 자유롭게 살았던 삶에 비해 글쓰기에 한해서는 굉장히 엄격하게 대했는데 정해진 시간, 장소에서 글을 쓰려고 했으며 도중엔 술도 마시지 않았고 그 몰입을 방해하는 사람에겐 괴팍하게 화를 냈다. 나는 예술가들의 이유 있는 고집과 괴팍함이 맘에 든다. 그 바탕에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 집필에 대한 혹독한 훈련과 자기 검열이 그를 자살로 몰고 간 듯 하다. 말년에 그는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글을 충실하게 쓰고 난 뒤 가벼운 걸음으로 하는 산책을 즐기던 그에게 참된 문장의 고갈은 부, 명예, 재혼으로도 채울 수 없는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하나 써야 해.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참된 문장 하나를 쓰면, 거기서부터 일이 저절로 풀려 나간다. 그러면 내가 알았거나, 겪었거나, 누가 하는 말을 들었던 하나의 참된 문장은 하나 있기 마련이어서 일이 쉬워진다. 혹시 말을 일부러 지어냈거나, 누가 무엇을 소개하고 제시하듯 글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나는 억지로 꾸민 상투적인 표현이나 장식적인 구절은 가차 없이 잘라내 버리고, 내가 써 놓은 참되고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들을 가지고 다시 글을 시작한다.

 

그저 글 쓰고 친구들을 만나며 파리에서 보낸 시절에 대해 남긴 남의 일기를 엿본 것 같지만, 이젠 볼 수 없는 사람들과 풍경을 마치 본 것처럼 믿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제목을 참 잘 지었다. 가본 적도 없는 파리, 먹어본 적도 없는 요리를 맛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하고, 그 축제의 느낌을 기차 칸에서나 호텔방에서나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게 잘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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