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년기의 충동적인 자살시도로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되어 가족들에게조차 버림받은 신세가 되면 어떨까?
마치 내 동창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동정심이 차오른다.
누가 봐도 불행해야 하는 상황인 주인공 ‘상현’은 의외로 전혀 불행해하지 않는다. 쓰레기장 같이 비좁은 주차관리실에서 지내면서, 오랜만에 찾아와 속을 긁는 동창들에게도 별 감흥을 느끼지 않고 보내버린다. 심지어 ‘인생이란 것이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쉽게 망쳐지도록 생겨먹지 않았다.’라는 그 태도에 읽는 내내 불쌍하게 여겨왔던 상현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아마 여고 동창들은 이런 담담하고 의연한 태도 때문에 상현을 따돌렸겠지.
그녀가 불행하지 않은 데엔 아마 ‘망각’이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사고로 인해 그녀는 과거 기억도 거의 잃었으며 몇 번 본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 그래서 그녀는 대부분 사람들이 발 묶여 사는 과거를 단지 어제의 일로 생각한다.
‘화무십일홍. 좋은 날도 더러운 날도 다 지나가. 어차피 관뚜껑 닫고 들어가면 다 똑같아.’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처럼 그녀는 지나간 일을 명백히 지나갔으며,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어 이제는 효력을 다한 과거로 묻어둘 줄 안다.
우리는 매일 지나간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오늘 했던 말실수, 나를 상처 줬던 사람들의 언행..대개는 부정적인 기억일수록 오래 가져간다. 그 사건은 한 번 일어났을 뿐이지만, 생각으로 몇 번이나 다시 경험하며 상처를 키워간다. 누군가에 의해 쉽게 망쳐지도록 생겨먹지 않았다는 말은 우리 인생이 타인에게 영향 받는 것보다 우리가 선택한 기억, 마음가짐으로 결정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지옥의 형태’의 주인공 율희는 그 단적인 예이다. 유년기 결핍으로 인한 불안을 잊으려고 인간관계에 집착하고 갖지 못하면 잔인하게 망쳐 버린다. 자신에게 곁을 주지 않는 상현에 대한 앙심으로 선생님과의 스캔들을 지어내 퍼트려 두 인생을 망쳐버린다.
처음엔 애궃게 삶의 방향이 달라져버린 그 둘을 대신해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사건에 매여 인생을 망친 건 가해자 율희였다. 그녀는 늘 만족스럽지 못한 관계와 그에 따른 괴로운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곪은 채 살다가 죽게 되고, 그 감정을 반복해 겪는 지옥을 경험한다.
그녀의 인생을 망친 것은 유년기에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은 부모의 탓일까? 삶의 대부분을 부정적인 감정의 방으로 채운 것은 누구의 영향이 아닌 그녀의 선택이 아닐까?
죽고 나서 살면서 느낀 감정을 반복해서 겪게 된다고 하면 모두 쓸데없는 후회와 걱정은 그만둘 것이다. 과거의 대단했던 경험이 이젠 대화거리도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모든 것은 지나가고 없어진다. 반복해봐야 진전 없는 쓸데없는 과거에선 벗어나고 싶다. 이불 몇 번 차면 지워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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