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던 순간과 계절을 저장한다.
하루키의 소설엔 그런 힘이 있다. 그의 에세이도 매력 있지만 그런 힘은 없다.
그의 소설은 좋은 작품인지와 상관없이 항상 몰입도가 넘친다. 이해가 되든 말든 며칠을 꽂혀 읽게 된다. 보통 이북으로 읽으니 두께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저 출근하면 책 읽으러 퇴근하고 싶고, 주말이면 아침에 눈뜨자마자 보기 시작해 빈백에 누워 읽다 잠들고, 깨면 다시 읽는 식이다.

그렇게 홀린 듯 읽다 보면 어느새 두꺼운 2, 3권의 소설은 끝나있고, 언제나 그렇듯 주제는 딱히 모르겠다. 느낌은 항상 비슷한데, 뭔가 축축한 안갯속을 걸어 나온 듯하다.
하지만 여운은 오래간다. 소설 속 벌어진 일들을 몽땅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지치고 허무해진다. 술이 몹시 당기고 건강한 가정식이 먹고 싶어 진다. 하루키의 음식 묘사는 정말 일품이다.

1Q84를 읽은 지 1년이 다돼간다. 여름이었는데 기가 막히게 그 계절이 돌아오니 하루키가 다시 찾아진다.
밤 산책을 나가면 여름 냄새가 나고, 샤워 후엔 왠지 하이볼이 당긴다. 하루키의 계절이 온 것이다.
다시 읽기로 마음먹자마자 마음이 설레온다. 읽고 딱히 느낀 바나 교훈이랄 것도 없지만, 그 안갯속 분위기와 세상에 나만 있는 것 같은 적막함에 다시 빠질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 첫 장을 쉽게 넘기지 못하고 글을 쓴다.

보통의 소설은 내용과 결말을 알고 나면 다시 읽고 싶지 않다. 굳이? 싶고 그 감정선을 다시 느끼는 게 수고롭게 느껴진다. 유명한 소설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같은 계절이 되면 문득 휴양지처럼 찾게되는 그런 소설이 있다. 내겐 하루키의 소설이 그렇다.

하루키의 소설 중 하나를 떠올리면 그걸 읽었던 여름이 지나간다.
쨍하고 따가운 햇볕과 에어컨으로 시원한 실내, 의자와 맨살 사이의 끈적한 감촉. 책 읽는 내내 즐겨 먹었던 곤약팝의 식감과 다 먹은 하이볼 잔의 녹은 얼음 맛 같은 게 한 번에 밀려온다.
뜻하지 않게 여름을 저장하는 버튼이 되었다. 여름이 설레는 이유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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