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대회(WBO 오리엔탈 동양챔피언 결정전)
처음으로 프로 복싱 경기를 직관했다.
관장님이 우리 체육관 선수도 출전한다며 보러오라고 했을 땐 동네 작은 경기인줄 알았다. 실제 선수들 경기도 재밌을 것 같아 산책겸 가봤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의 행사였다.
엑스포광장에 링을 설치해 사람도 많고 후원자에 정치인에 초대 가수까지 있었다.(애국가 전용 초대 가수를 부른 것도 신선했다.) 난 직업적으로도 지긋지긋하게 하는 의전 행사가 정말 싫은데, 이 행사에선 인사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링 위로 낑낑 올라오는 윗분들의 모습들을 보니 즐거웠다.
주먹의 세계에 정치인들은 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람들의 관심이 곧 후원이고 그래야 이런 경기도 열리고 하니 마음을 좋게 먹기로 했다.

알고보니 오늘 경기의 핵심은 동양 챔피언 강종선 선수의 방어전이었다. 그 전에 프로 선수들의 시합이 이어졌는데, 정말 프로 경기는 달랐다.
복린이인 난 스파링 2라운드만 해도 과호흡이 오는데, 30초씩 쉬어가며 긴 라운드를 정신력으로 버티는게 대단했다.
스포츠에 승패가 있는건 당연한 법인데 승자를 응원하다가도 링을 내려오는 패자의 씁쓸한 표정을 보는건 마음이 아팠다. 맞아가며 싸웠는데 내 앞에서 환호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상대편의 모습을 난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스포츠 정신도 나를 다스리는 철학인 것 같다.
부상을 보는 건 더 힘들었다. 국제전 중 아르헨티나 선수 한명은 눈썹 쪽이 찢어져 계속 지혈하며 시합을 이어갔다. 그래도 피가 자꾸 흐르자 코치는 흰수건을 던졌고, 선수는 괴로워했다. 먼 땅까지 와서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경기를 포기해야 하는 마음과 본인 선수 얼굴에 피가 번지는 걸 보고 수건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코치의 입장 다 안타까웠다.
복싱은 즐겁지만 싸움은 내 성향에 안맞는 것 같다. 보는 내내 몰입을 해 진이 빠졌다.

3시간 정도 지나서야 드디어 강종선 선수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직관한게 행운인 경기였다. 내내 치열하고 아드레날린이 넘쳤다. 챔프들이 다르다고 느낀건 8라운드에도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주먹이 나가고, 치명적인 펀치를 맞고도 본능적으로 가드 올리고 다음 공격들을 피한다는 점이었다. 앞선 경기에선 선수들이 지쳐갈수록 가드가 내려가는게 보였다.

챔프 경기답게 3라운드 가기도 전에 선수들의 얼굴과 링 위에 피가 튀기기 시작했다. 강종선 선수가 KO펀치를 3번이나 쳤는데, 처음 펀치 이후 상대 필리핀 선수(페테 아폴리날)의 기세가 확연히 꺾인게 보였다. 그럼에도 8라운드까지 공격을 입혔으니 그 선수도 정신력이 대단하다.
마지막 8라운드에서 KO펀치를 맞고 페테 선수가 초점을 잃고 휘청거렸다. 심판이 경기종료를 알렸고, 강선수는 줄위로 뛰쳐올라가 포효했다.

영화에서나 볼법한 경기를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정말 공짜로 보기 아까운 경기 구성이었다. 물론 휘청거린 페테 선수의 얼굴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긴 했다.
직관해서 지루하지 않은 스포츠는 복싱이 처음이었다. 왜 인간이 원초적으로 싸움과 그 구경을 좋아하는지 이해가 됐다.(그럼에도 로마시대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노예 싸움까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간만에 주먹뽕이 차오르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