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모두의 등엔 수레바퀴가 하나씩 얹어져 있다. 크기와 구르는 속도도 다르며 심지어 자신이 아닌 남이 대신 밀어 가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살다 바퀴에 깔리거나 고꾸라질 때면 새삼 놀라 멈추고 길을 잃는다. ‘내가 살아온 이유가 고작 남이 떠미는 수레바퀴 때문이었다고?’ 하는 생각과 함께 허무감에 빠지기도 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르만 헤세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자전적인 소설이다. 주인공 한스도 작가처럼 독실하고 엄격한 부모님의 뜻대로 착실한 유년기를 보내다가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중퇴하게 된다. 이후 남은 청년기를 신경쇠약과 지독한 두통으로 보내며 몇 번의 자살시도까지 하게 된다.
한스는 교양과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이런 배경에서 태어난 아이의 총명함은 비극이 된다. 재능과 잠재력을 뒷받침해줄 수 없는 환경에서 천재가 아닌 비상한 정도의 재능은 다른 세상으로 벗어날 수 있는 큰 날개가 되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 작은 날개에 가족들까지 줄줄이 추처럼 매달리게 된다.
보잘 것 없는 자신보다 높은 위치로 사다리를 놔줄 것이라는 아버지와, 개천에서 용으로 거듭나 학교의 명성을 높여줄 것이라는 교장의 기대감으로 한스는 ‘의무’에만 초점을 맞춘 삶을 살아간다. 또래에게 느끼는 우월감 때문에 본인이 매달린 것도 있지만 그건 진정한 자신의 선택이 아닌 만들어진 욕구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들의 소망을 한스를 통해 이루려고 하고,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오직 그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폭력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그의 마음 속 나태함을 몰아내려고 한다. 그 폭력 속에서 한스의 정신은 고장이 난다.
고작 열 몇 살인 한스에게 지워진 기대감의 무게,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물어뜯듯 달려드는 경멸감과 실망감이 두려워 그는 계속 달린다. 자신의 행복보다 의무감에 쫓겨 살다 오래되지 않아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길을 잃게 된다. 자신을 밀고 가던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된 것이다. 애초부터 그 수레바퀴는 그가 아닌 주변 사람들이 밀고 가던 것이다.
그들은 수레바퀴가 원활하게 흘러갈 때만 자신의 공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다 비틀대고 고꾸라지기라도 하는 날엔 당장 손을 떼고 연약한 주인의 정신을 탓한다.
그중 잠깐이지만 신학교에서 만난 친구 하일너와의 우정은 처음으로 그에게 의무에서 벗어난 진정한 삶을 맛보게 해준다. 하일너가 더 오래 곁에 있었더라면 한스는 묶인 추들을 풀어내고 자신의 삶을 사는 법을 터득했을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는 스스로를 황야의 외로운 이리라고 표현하며 ‘나는 동년배의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기쁨을 나누는 것이 힘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른 이로부터 절망적으로 단절 돼있었다. 살아가는 일은 나에게 전혀 허락되지 않는 일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하일너나 데미안을 보면 종이 다른 무리 속에 섞여 사는 것에 고통 받았던 헤세가 영혼을 일깨워줄 수 있는 영원한 우정을 갈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정은 그동안 그가 놓친 많은 것을 보상해주는 귀한 보물이었다. 의무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예전의 무미건조한 삶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고귀하고 따뜻한 삶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인데 사람들은 수레바퀴가 잘 닦여진 성공의 길로 얼마나 원활하게 흘러가는 지에만 관심이 있다. 건강을 잃거나 우울증에 걸리고 나면 모두 아무것도 아닐 일이다. 제3자의 눈으로 한스의 삶을 보면 성공의 길이라는 게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내 이야기일 때 그 판단은 어려워진다. 내 삶도 결정에 나보다 주위사람의 입장이 먼저 반영되는 일이 허다하다. 어깨에 짊어진 그들의 기대감과 자부심은 원동력이 될 때도 있지만 결국 넘을 수 없는 한계가 되어 날 옭아맨다. 연결된 모든 연을 끊고 고아가 돼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했다. 내가 가진 권태롭지만 안정적인 삶, 직장, 인간관계 모두를 소설 속 주인공의 것으로 대입해 보면 미련가질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 행복을 위해선 그까짓 건 얼마든지 포기하라고 답답해 외쳤을 것이다.
다시 내일은 출근을 해야 할 테지만 멈춰서 생각하게 한다. 내 삶은 오늘 밤 갑자기 술에 취해 강물에 빠져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삶인지. 내 수레바퀴는 지금껏 누가 밀어왔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