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 빌 브라이슨(권태로부터의 자유)

한달 전 쯤 모든 것에 권태를 느꼈다. 바쁜 일과 매일 똑같은 사람들, 반복되는 얘기. 평범한 일상이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잃고 나서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의 많은 문제는 권태에서 오는 것 같다. 반복되는 트루먼 쇼 같은 일상에 지겨움을 느끼고 더 자극적이고 큰 것을 바란다. 사실 권태는 모든 것이 충족되어서 오는 것인데 거기서 더 채우려고 한다. 더 멀리 좋은 것을 보겠다고 차를 끌고 꽃놀이에 나서서는 차가 막힌다고, 주차공간이 없다고 짜증을 낸다. 일상을 탈피하려고 한 노력은 결국 허무함만 남긴다.
‘나를 부르는 숲’의 저자 빌 브라이슨은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하며 축축한 산을 제대로 된 음식과 잘 곳 없이 30키로씩 걷는 고행을 하는데, 그 백미가 상실에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철저히 일상생활의 편리함에서 격리시키는 것, 그래서 치즈나 사탕 한 봉지에 감읍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즉 삶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낮은 수준의 환희를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점을 얻는다는 것이다.
나는 거창하게 고행씩이나 할 자신은 없지만, 종아리가 터지게 걷거나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한 번씩 걷고 나면 일상을 대하는 자세가 바뀌기 때문이다. 모든 역치가 낮아져 작은 것에서도 행복감을 극치로 느낄 수 있다. 꼭 산티아고의 순례길을 걷지 않아도 ‘상실’ 하나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상실이 있기 전엔 우린 사소한 일상에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내가 지향하는 삶의 기조는 ‘평온’이다. 하지만 평온함은 권태와 다르다. 그 차이는 아무래도 주체감에서 오는 것 같다. 평온함은 내가 노력해 만들어 낸 상태이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재벌 며느리로 들어가 부족한 것 없지만 정신이 죽어 있는 상태로 사는 주인공은 스스로를 ‘박제’되었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채로 생기는 야금야금 증발하고 꺼풀만 반듯하게 보존되는 중인 상태. 사는 데 힘든 점 하나 없지만 그저 내맡긴 인생이라는 뜻이다.
박제되지 않고 평온하게 사는 것은 어렵다. 적당히 상실을 느껴가면서 유지해야 하니까. 권태가 느껴지면 사람도 멀리 했다가 차, 핸드폰도 잠깐씩 떨어트려 두면서 자유로워지려 애써보자. 더 채우려고 하는 것 보다 간단하고 효과는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