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평

이언 매큐언 - 견딜 수 없는 사랑

일인분 2023. 5. 1. 21:54

이건 한 마디로 굉장히 답답하고 짜증나는 소설이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조여오고 답답했다.
그 불편함이 어디서 오나 했더니 진실이 뻔히 보이는데 헛다리를 짚고 고집을 피워대는 인물들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조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건지, 초반부터 패리가 미친사람인건 확실했는데 왜 경찰이든 애인이든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건지.'

이 답답함을 통해 느낀 결론은 이거다. 인간의 사고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같은 사건도 각자의 틀에 맞춰 왜곡해 기억한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집착은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소설에선 '자기설득'과 '객관성'에 대한 언급이 계속된다. 객관성은 불운한 사회적 전략이라고 한다. 객관성을 유지한다면 사람들의 신뢰와 공감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등장인물들은 다 본인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젠 인간이 어떤 문제에 대해 타인의 동의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 우리는 절반만 공유되는 믿을 수 없는 인식의 안개 속에서 살았고, 우리의 감각 정보는 욕망과 믿음의 프리즘에 의해 왜곡되었으며, 그 프리즘은 우리의 기억까지도 왜곡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보고 이롭게 기억했고,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설득했다.

냉혹한 객관성은,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한 냉혹한 객관성은 늘 불운한 사회적 전략이었다.
우리는 분개해 반쪽짜리 진실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후계자이고, 이 이야기꾼들은 남을 확신시키기 위해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수세대에 걸쳐 성공이 우리를 걸러내왔고 성공과 함께 우리의 결점도 나타났는데, 결점은 우마차가 다니는 시골길에 난 바큇자국처럼 우리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 결점이 우리에게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 믿는 대로 보인다.

객관적인 진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없었다. 바큇자국이 너무 깊었다. 객관성에서 사적인 구원은 있을 수 없었다.


과학 칼럼니스트이자 스스로도 자신의 합리적 분석 과정을 자랑스러워하는 조마저 스트레스 앞에선 냉정함을 잃고 돌연 포기했던 예전 꿈인 과학계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누가 보기에도 실현 가능성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이 결정은 클라리사에게 남편의 제정신을 의심할 구색좋은 이유가 되었다.

클라리사는 나중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고난 후에도 답답한 소리를 한다.
패리의 스토킹을 극한적인 상황까지 몰아부친게 그였다며, 조의 집착과 초조함이 패리에게 작용해 죄책감의 탈출구를 마련해줬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얼마나 화가 났던지. 경찰과 그녀는 계속 패리와 차 한잔을 하면서 오해를 풀어보라고 한다. 그놈의 차 한잔. 스토커와 차 한잔하는 미친사람이 어디있다고.

마지못해 사과는 했지만, 끝까지 자신이 틀렸다고 믿고싶지 않은 비겁한 속내가 드러난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그에 맞는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자기설득'의 과정으로 실제로 그녀 본인조차 그게 합리적 추론이라고 믿고있을 것이다.

자기 설득은 진화심리학자들이 매우 좋아하는 개념이었다.
인간이 항상 그래왔듯 집단 속에서 산다면, 자신의 욕구와 이해관계를 타인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자신의 건강과 행복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계략도 써야 했다. 먼저 자신을 완벽히 설득해서 자신이 하는 말을 믿는 척 연기할 필요조차 없다면 가장 큰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속인 개인들은 출세해서 잘살았고, 그들의 유전자도 번성했다. 그래서 우리가 옥신각신 다툰 것이다. 우리 주장의 약점을 선택적으로 모른 척하고 특별히 옹호하는 데 우리의 고유한 지성이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소설 속 인물 모두가 크고 작은 자기설득을 보여주지만, 그중 가장 뒤틀린 왜곡과 집착을 가진건 당연히 패리이다. 그는 외로웠던 유년기의 결핍을 채워줄 대상으로 종교를 만났고, 그 집착은 점점 심해지다 열기구 사고로 촉발된다.

종교는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에도 영향을 미쳐, 결속력과 정체성, 그리고 나와 나의 교우들이 옳다는 느낌을 심어준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 된 것이다. 광적인 하나 됨에 고무되고, 끔찍한 확신으로 무장한 우리는 이웃 부족을 급습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그들을 두들겨패고 강간한 후, 정의감에 불타고 우리의 신들이 약속한 바로 그 승리감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수천 년에 걸쳐 그런 일이 5만 번 반복되면, 근거 없는 확신을 관리하는 복잡한 유전자들이 널리 퍼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종교에서의 집착이 여느 집착보다 무서운 이유는 결속력과 면죄부에 있다. 어떠한 대상에 대한 믿음이 집단을 이뤄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것에 집착할 때 정당성이 부여되며 신념은 굳건해진다. 심지어 질서를 무시한 강경한 행동마저 뒷받침해주는 것이 신이라면, 그건 엄청난 면죄부가 된다.
극단적인 예시지만 패리의 믿음 안에선 하느님을 믿지않는 자를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와 주변인들을 해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다. 끔찍한 피해를 입히고도 피해자와 하느님 모두가 원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 집착의 광기엔 책임감도 정도도 없다.

사랑의 병적인 측면과 종교인이 다니는 교회의 신조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 사실일 수 있다.개신교의 목사들은 신도들 사이에서 누리는 지위 때문에 성적인 망상의 대상이 되어왔다.

패리의 집착에서 요즘 논란인 JMS 가 떠올랐다. 보통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교리와 그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 평화를 위한 종교에서 믿음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는 폭력들.
인간의 사고는 애초에 이성적이지 못한데, 스트레스 상황 아래에 결핍이 더해지면 충분히 비정상적인 것에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지위를 자신의 결핍을 포용해 줄 수 있는 능력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내 삶은 계속 이렇게 타인의 집착에 종속되어야 하는 걸까?
소설의 주제를 보여주는 문장이다. 사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집합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믿음과 이익을 저울질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집착이 된다. 인간은 서로에게 집착하고 집착으로 편을 나누며 갈등이 시작된다.
남과 함께 살기 위해 발달한 인간의 비논리성과 자기설득이 지나치게 커지면 타인을 위협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요즘 젊은이들을 피상적으로 위로하는 책이나 sns글귀를 보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각자 자신의 마음에만 귀기울인다면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 마음 속 소리가 비합리적이고 왜곡돼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인지하는 것만 해도 갈등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사소한 것 부터. 부부싸움으로 번지기 전, '내가 정말 물건을 제 자리에 둔게 맞나? 저번에도 똑같은 말을 한 게 내 착각은 아니었나?' 생각해보고 좋아하는 작가나 강사의 사생활도 무결점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내 환상과 강요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자신도 상처를 덜 받고, 갈등이 재앙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방법이다.